2,000원짜리 밀키스를 못 사던 여름에서 시작해 GPU 수십 장까지. 남들이 99에서 멈출 때 255를 찾아온 30년의 기록.
알파벳 하나를 찾으려고 한여름에 40분을 걸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어머니께 C언어 책을 사달라고 했다가 핀잔만 들었습니다. "초등학생이 무슨 그런 어려운 책을."
그래서 동네 서점으로 갔습니다. 살 돈이 없으면 거기서 읽으면 되니까요.
서점 구석에 서서 입문서를 한 장씩 읽고, 컴퓨터로 쳐야 하는 예제는 연습장에 손으로 베꼈습니다. 집에 와서 도스의 파란 터보C 화면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컴파일.
에러.
몇 번을 봐도 똑같았습니다. 분명히 똑같이 적었는데 도무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연습장을 들고 뙤약볕에 20분을 다시 걸었습니다. 책을 펴고 제 글씨와 한 글자씩 대조했습니다. 그리고 찾았습니다.
stdio를 studio로 적었더군요. 표준 입출력의 약자라는 걸 몰라서, 제가 아는 영어 단어인 '스튜디오'로 읽은 겁니다.
알파벳 하나. 그것 때문에 왕복 40분을 걸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고치고 다시 컴파일했습니다. 화면에 한 줄이 떴습니다. Hello, World!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기계에 명령했고, 기계가 정확히 그대로 했습니다.
그 감각 하나로 30년을 버텼습니다.

1바이트가 담을 수 있는 가장 큰 수는 99가 아닙니다.
《삼국지 영걸전》에 빠졌습니다. 게임이 너무 어려우면 디스크 에디터로 세이브 파일을 열어 16진수 값을 직접 고치곤 했는데, 매번 주소를 찾는 게 귀찮아서 자동으로 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때 천리안과 하이텔 자료실에 올라온 에디터들은 전부 장수 레벨을 99까지만 올려줬습니다. 게임의 최고 레벨이 99였으니까요.
그런데 세이브 파일을 분석하다 이상한 걸 봤습니다. 장수 레벨은 1바이트에 저장되고 있었습니다.
1바이트가 담을 수 있는 가장 큰 부호 없는 정수는 255입니다. 16진수로 FF.
그럼 99가 아니라 255까지 올라가는 거 아닌가?
시험 삼아 값을 바꿨습니다. 정말로 255가 됐습니다.
그 기능을 자동화해 자료실에 올렸습니다. 며칠 뒤 접속해보니 글이 쌓여 있었습니다.
"다른 에디터는 99가 끝인데 이건 255까지 되네요."
"대박입니다. 잘 쓰겠습니다."
아무도 그걸 올린 사람이 초등학생인 줄 몰랐습니다.
그날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컴퓨터는 사람이 정해놓은 상식을 반드시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만든 것을 남이 쓰고 고마워하는 일은 중독적일 만큼 즐겁다.

수선집 사장님은 저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셨습니다.
대학 시절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의외로 컴퓨터가 아니라 옷장사에서 왔습니다.
리바이스 타입원 청자켓 악성 재고 80장을 장당 5만 원에 넘겨받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전부 400만 원. 대학생에게는 큰돈이었고, 그대로 팔아서는 승산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다 시장의 빈틈이 보였습니다. 청조끼가 유행할 조짐이 있는데, 정작 리바이스 정품 청조끼를 파는 곳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청자켓은 있는데 청조끼가 없다. 그럼 소매를 자르면 되잖아.
청자켓 80장을 들고 수선집에 가서 양쪽 소매를 전부 잘라달라고 했습니다. 멀쩡한 새 옷을요.
결과물은 생각보다 훌륭했습니다. 원래부터 청조끼로 출시된 제품처럼 자연스러웠습니다.
옥션에 올렸습니다. 제목은 '국내 유일 리바이스 정품 타입원 청조끼'. 가격은 장당 15만 원.
한 달 만에 80장이 전부 팔렸습니다.
돈은 반드시 대단한 기술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시장에 없는 것을 찾아 사람들이 원하는 형태로 바꾸면 됩니다. 그 뒤로 저는 기술을 기술로만 보지 않게 됐습니다.

데이터베이스를 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전부 메모리에 올렸습니다.
그해 가을, 《바람의나라》 서버를 혼자 리버스 엔지니어링해서 구현해보기로 했습니다.
학부생이라 데이터베이스를 제대로 다룰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습니다. 모르면 아는 방법으로 만들면 되니까요.
아이템, 몬스터, 맵, 사용자 설정을 전부 텍스트 파일에 저장하고, 서버가 시작될 때 그것들을 통째로 메모리에 올렸습니다. 값이 바뀌면 일정 시간마다 파일에 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식하고 투박한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작동했습니다.
클라이언트와 서버 사이의 패킷을 하나씩 분석하며 기능을 붙였습니다. 몬스터가 움직이고, 마법이 터지고, 아이템이 떨어지고, 유저끼리 교환까지 됐습니다.
몇백 줄짜리 소켓 채팅 예제로 시작한 코드가 3개월 뒤 10만 줄이 됐습니다.
그동안 하루에 3~4시간밖에 자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잠이 아까웠고, 때로는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서 클래스 구조와 패킷 처리 로직이 계속 움직였습니다. 이러다 몸이 잘못되는 건 아닐까 걱정돼 억지로 잠을 청할 정도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 제가 상상한 하나의 세계가 실제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강렬한 몰입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수십 대의 컴퓨터 안에서 수백 개의 가상머신이 24시간 돌았습니다.
2014년에 옮긴 직장은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참 묘합니다. 그렇게 원했던 여유가 생기자 이번에는 심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본능이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업을 시작했습니다. 인스타그램 자동 마케팅 도구였습니다.
거창한 기술은 없었습니다. 중고 워크스테이션에 윈도우 XP 가상머신을 띄우고, 매크로로 작업을 자동화했습니다. 고객이 웹사이트에서 설정을 입력하면 가상머신이 알아서 움직이는 구조였습니다. 정말 원시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됐습니다.
지인들에게 월 5만 원씩 받던 게 입소문을 탔습니다. 수십 대의 워크스테이션 안에서 수백 개의 가상머신이 24시간 움직였습니다. 사무실은 작은 자동화 공장이 됐습니다.
한창 잘될 때는 월 순이익이 월급쟁이 시절 급여의 수십 배가 됐습니다.
그러다 인스타그램이 봇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고객들의 계정이 대거 정지되는 사고가 났습니다. 문제를 해결한 뒤에도 그 위험을 안고 계속할 자신이 없어 접었습니다.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코드 몇 줄이 사람 대신 일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남의 플랫폼 위에 세운 사업은 그 플랫폼의 정책이 바뀌는 순간 무너진다는 것.
이 교훈은 6년 뒤에 제 사업 전체를 살리게 됩니다.

반려당한 게 아닙니다. 그냥 결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2014년, 증권사를 거쳐 서울에 있는 국립대학교 정보화본부로 옮겼습니다. 누군가는 '신이 숨겨놓은 직장'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도 정말 기뻐하셨고, 저도 이제 평생 다닐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행복했습니다. 증권사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유가 생겼고, 정시에 퇴근했고, 주말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런데 사이가 좋지 않던 상사가 과장이 된 뒤부터 인사평가가 계속 최하위권이었습니다. 8년을 다니는 동안 동기들이 세 번 승진할 때 저는 한 번 했습니다.
한두 번이면 그러려니 합니다. 반복되면 사람이 조금씩 무너집니다.
가장 괴로웠던 건 돈도 직급도 아니고 무력감이었습니다. 저는 컴퓨터 앞에서는 꽤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코드가 잘못되면 고치면 되고, 막히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제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의 평가였습니다.
그러던 2022년, 학교에 자기개발휴직 제도가 처음 생겼습니다. 1년 무급으로 사업에 도전해볼 수 있었습니다. 잘되면 나가고, 안되면 돌아오면 됩니다. 가족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이보다 좋은 선택지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내와 1박 2일 동안 계획서를 썼습니다.
상사는 결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반려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렀고, 인사과에 서류를 보내야 하는 기한이 지나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 제도의 신청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제 서류만 인사과까지 도착했더라면 휴직 기회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때 무언가가 끊어졌습니다.
통장에 4억이 있었는데, 2,000원짜리 음료수를 사지 못했습니다.
2022년 7월, 사표를 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 정년, 사회적 지위. 많은 사람이 얻고 싶어 하는 것들을 스스로 내려놨습니다.
남들은 미쳤다고 할 수도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니는 것도 위험이고 그만두는 것도 위험이라면, 적어도 제 손으로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쪽을 고르고 싶었습니다.
그해 여름, 편의점 냉장고 앞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점심을 과하게 먹었는지 속이 더부룩했고 탄산이 당겼습니다. 군 복무 시절 생활관 자판기에서 500원에 뽑아 마시던 밀키스가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가격표를 보는 순간 멈칫했습니다.
2,000원.
살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결국 그냥 나왔습니다.
웃긴 이야기입니다. 그때 제 통장에는 4억 원이 넘는 돈이 있었습니다. 퇴직금과, 타고 다니던 차를 처분한 돈과, 그전에 벌어둔 수익까지 합친 금액이었습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2,000원짜리 한 캔을 사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살 수 있었지만 사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월급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4억은 마음껏 써도 되는 돈이 아니라, 사업이 자리 잡을 때까지 버텨야 하는 생존자금이었습니다.
생활비를 줄이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버틸 시간이 늘어나면 성공할 기회도 늘어납니다.

막 그만둔 학교의 이름이 붙은 6만 원짜리 중고 의자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이었습니다. 월 36만 원짜리 공유오피스. 두 평 남짓한 공간에 책상과 의자를 밀어 넣으면 끝이었고, 얇은 판넬 벽 너머로 옆방 사람의 키보드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습니다.
직접 산 갈색 책상 하나. 당근마켓에서 6만 원에 산 중고 의자. 재미있게도 그 의자에는 제가 막 그만둔 학교의 이름이 별명처럼 붙어 있었습니다. 그 학교를 그만둔 사람이, 그 이름이 붙은 의자에 앉아 새 인생을 시작한 셈입니다.
매일 아침 9시 전에 출근해 밤 10시, 때로는 11시에 집에 갔습니다. 수익은 0원이었습니다.
칸막이 방이 20개 넘게 있었는데, 넉 달쯤 지나니 입주자가 거의 다 바뀌어 있었습니다. 어느새 제가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날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좋았던 게 하나 있습니다. 커피머신이 무제한이었습니다.
그 방에서 만든 첫 앱의 광고 수익이 처음 정산됐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습니다.
"이제 사무실 월세 36만 원은 내고도 남네."
고작 몇십만 원이었습니다. 직장 다닐 때 월급보다 훨씬 적었고, 예전 부업에서는 그보다 훨씬 큰돈을 벌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주는 월급이 아니라, 제가 만든 것을 사람들이 써서 들어온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2주 뒤 두뇌를 꺼버리겠다는 메일이 왔습니다.
ChatGPT를 처음 써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수많은 프로그램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기술이었습니다. 컴퓨터가 사람의 말을 이해하고, 사람처럼 대화했습니다.
곧바로 AI 캐릭터와 대화하는 앱을 만들었습니다.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습니다. 사용자가 몰리고 결제가 터졌습니다. 수없이 앱을 만들고 실패했던 시간이 드디어 보상받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터졌구나.'
그러던 어느 날, OpenAI에서 경고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정책에 맞지 않는 사용이 많으니 시정하지 않으면 2주 뒤 API 접근을 차단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강하게 필터링하면 매출의 대부분을 잃습니다. 그대로 두면 차단됩니다. 어느 쪽이든 끝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 서비스의 두뇌는 전부 남의 서버에 있었습니다. 앱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공급자가 잠그면 그날로 끝나는 구조였습니다.
6년 전 인스타그램에서 이미 배운 교훈이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사업 규모가 더 컸고, 잃을 것도 훨씬 많았습니다.
시간은 흘렀습니다. 데드라인까지 일주일 남았을 때,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 다시 나왔습니다.
왜 꼭 남의 AI를 써야 하지? 내 서버에서 직접 돌리면 되잖아.
RTX 4090 두 장을 샀습니다. 직접 워크스테이션을 꾸리고 공개된 언어모델을 수십 개 올려 테스트했습니다. 전반적인 지능은 GPT-3.5에 한참 못 미쳤지만, 라마 기반의 롤플레잉 특화 모델 MythoMax 13B가 캐릭터 대화에 필요한 표현력만큼은 쓸 만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직접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백엔드가 자체 서버를 바라보도록 바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차단 통보일이 왔습니다.
서비스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달라진 응답 특성을 좋아하는 고객도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코드락은 대체할 수 있는 것을 전부 직접 돌립니다.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을 보여주고 나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을 보여주고 나니 오히려 허무했다.
2025년 어느 날,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타고 제가 8년을 다닌 그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정보화본부 주차장 한가운데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곳에는 저를 계속 최하위로 평가했던 그 상사도 여전히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제 차를 직접 봤는지는 모릅니다. 주차장 한가운데였으니 봤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옛 동료들이 보고 싶어서만 간 게 아니었습니다.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9년 가까이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동기들이 승진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반복되는 최하위 고과에 자존감이 떨어졌고, 휴직 기회조차 제대로 시도해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속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보세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이상했습니다. 생각만큼 통쾌하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끝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설령 후회했다 한들 제가 겪은 9년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나는 이미 증명할 만큼 증명했구나. 내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을 더 이상 과거의 상사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회사의 직원은 0명입니다. 그리고 생산성은 몇 배가 됐습니다.
두 장으로 시작한 GPU는 지금 수십 장이 됐습니다. 서버마다 모델을 올려 vLLM으로 추론하고, 앞단의 nginx가 요청을 분산합니다. 한 대가 고장 나도 나머지가 이어받고, 정전이나 장애 때만 외부로 우회합니다.
이런 시스템을 만들 때 저는 이상하게 행복합니다. 요청 하나가 들어와 어떤 서버로 전달되고, 모델이 답변을 만들고, 다시 사용자에게 돌아가는 흐름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일이 재미있습니다.
한때는 직원 두 명과 함께 일했습니다. 사진 크롭 같은 단순 반복 업무를 맡기고 저는 개발에 집중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AI가 그 단순 업무를 처리하게 되면서 직원들에게 더 복잡한 일을 맡기기 시작했고, 거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설명하고, 확인하고, 검토하고, 고치게 하는 데 하루 두세 시간이 들었습니다. 직원들이 7시에 퇴근하면 그제야 제 일을 시작해 밤 10시, 11시까지 남았습니다.
묘하게 억울했습니다. 대표니까 더 일하는 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통에 시간을 쓰느라 정작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을 밤에 해야 한다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지금은 혼자입니다. AI 에이전트 세션을 다섯 개 이상 띄워놓고 전체 구조와 방향만 정합니다. 코드 작성과 수정과 반복 작업은 에이전트가 하고, 저는 결과를 검증하고 교정합니다.
생산성은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몇 배로 올라갔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생각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일을 적게 하려고 자동화하는 게 아닙니다. 좋아하는 일에 더 오래, 더 깊게 몰입하려고 자동화합니다.
이제 정해진 퇴근시간은 없습니다. 재미있는 문제가 있으면 새벽까지 붙잡고, 데이터를 기다려야 하면 오후 6시에 집에 갑니다. 제가 사무실에 더 오래 앉아 있다고 데이터가 빨리 쌓이는 건 아니니까요.

이번에는 누군가에게 증명하기 위한 도전이 아닙니다.
지금 네 개의 서비스가 돌아가고, 월 순이익은 수천만 원대입니다. 생활하는 데 부족함은 없습니다. 좋은 차도 타고, 넓은 사무실도 씁니다.
그런데도 새 목표를 하나 세웠습니다. 그 돈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지금 눈앞의 숫자가 정말 한계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다만 예전과는 목표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저를 낮게 평가했던 사람들에게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이번에는 제가 선택한 모험입니다. 그 차이가 참 큽니다.
물론 그 목표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압니다. 지금 사업을 조금 더 열심히 한다고 쉽게 닿는 숫자가 아닙니다. 기술력이 좋고 성공 경험이 많아도 다음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닙니다. 수없이 실패해봤으니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과거처럼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달려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젊었을 때는 밤을 새우는 게 열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압니다. 제가 건강해야 코딩도 사업도 계속 즐길 수 있다는 것을.
1996년의 그 소년은 아직도 제 안에서 코딩하고 있습니다. 단지 이제는 터보C 대신 AI 에이전트 다섯 개를 띄워놓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재미있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제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255도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초등학교 5학년. 서점에서 베껴 적은 예제로 C언어를 익히고, 터보C로 《삼국지 영걸전》 에디터를 만들어 천리안에 배포. 레벨을 255까지 올려준 유일한 에디터였습니다.
CH 02중학교 2학년. SoftICE로 상용 유틸리티의 인증 로직을 어셈블리 단위로 역추적. 불법인 걸 알았기에 배포하지 않고 공부로만 남겼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스택·힙 오버플로우와 복귀 주소, 쉘코드를 익혀 해커즈랩 명예의 전당 17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고려대학교 컴퓨터정보학과 입학.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iframe을 심어 방문자 추적 시스템을 만들고, PHP로 조회 사이트까지 붙였습니다. 친한 친구들에게만 설치해줬습니다.
국내 최연소 CISSP 시험 합격. 당시에는 실무 경력이 모자라 합격 상태로만 남겨뒀습니다.
리바이스 타입원 청자켓 80장의 소매를 잘라 청조끼로 바꿔 한 달 만에 완판.
CH 03《바람의나라》 프리서버를 혼자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구현. 3개월, 10만 줄, 본섭 대비 구현율 약 80%. 100개가량 판매했습니다.
CH 04공군 전산병. 교육사령부에서 Struts·Oracle 기반 내부 시스템을 개발하고, 본부 중앙전산원에 10개월 파견 근무했습니다.
CISA 시험 합격.
미국 웨스턴 워싱턴 대학교 교환학생 1년.
NH투자증권 IT본부 공채 4기 입사. 기획, 정보보안, 장내 매매 시스템 개발과 운영.
경력 요건을 채워 CISSP·CISA 정식 자격 취득.
서울에 있는 국립대학교 법인 공채 2기로 이직. 정보화본부 근무 시작.
인스타그램 자동 마케팅 도구. 중고 워크스테이션 수십 대에 가상머신 수백 개를 띄워 3년간 운영하다, 고객 계정이 대거 정지되며 접었습니다.
CH 05프록시나라. 사업자가 없어 결제를 붙일 수 없자, 알뜰폰 공기계 한 대가 입금 문자를 읽어 포인트를 자동 충전하는 무인 결제를 만들었습니다.
자기개발휴직 신청서가 결재되지 않은 채 기한이 지나갔습니다. 7월에 사표.
CH 06월 36만 원짜리 2평 공유오피스에서 재시작. 첫 앱 퀵뉴스를 시작으로 2주에 하나씩 앱을 냈습니다.
CH 08AI 캐릭터 채팅 서비스 출시. 직후 OpenAI의 API 차단 통보를 받고, 남은 일주일 동안 RTX 4090 두 장으로 자체 추론 전환.
CH 09AI 운세 서비스 출시. 3개월 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롤스로이스를 타고 전 직장에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허무했습니다.
CH 10RTX 5090과 RTX PRO 6000 수십 대. vLLM과 nginx 라운드로빈으로 자체 AI 인프라를 완성했습니다. 이미지와 영상도 ComfyUI 파이프라인으로 자동 생성합니다. 부품이 고장 나면 직접 갈아 끼웁니다.
CH 11